일기를 쓰다가 다른사람과 나누어도 재밌을 이야기 같아서 가져와봤습니다. 수험생이나 ADHD인간(뭐라고 부르나요 일단 '환우'는 영 아닌듯), 둘 다이거나 둘 다 아닌 사람이라도 열심히 살고는 싶은데 그게 잘 안되는 경험을 해본 분이라면 일정 부분 공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제가 내린 결론 말고도 본인만의 돌파법, 깨달음이 있다면 댓글에 공유해 주시면 멋질 것 같습니다. 마지막엔 이 주제에 관해 제게 영향을 준 영상 두개와, 앞으로 봐야겠다고 마음먹은 책 두 권을 소개할게요.
어떤 중요한 일을 앞두고 마냥 하기 싫은 기분만 든다면 "내가 두려움 때문에 직면한 문제를 회피하고 있진 않은지"를 되돌아봐야 한다. 이건 살면서 알게 된 나에관한 몇 안되는 사실 중 하나이다.
설렁설렁은 멋있지 않아
우리는 별로 애쓰는 것 같지 않은데 특출난 성과, 특출난 창작물을 뚝딱 내놓는 천재들을 좋아한다. 별 노력 안했는데,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았다던데,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사람들의 기대보다 더 훌륭한 결과물을 내놓는 '능력자 스타', '신동'은 분야를 막론하고 여러 매체에서 정말 매력적으로 그려진다.
나는 특히 그런 이미지를 동경하고, 나도 그런 사람이라면 좋겠다 하는 소망을 품었다. 더 정확하게는, 그런 사람처럼 보이기를 원했다. 이런 소망은 내 삶의 태도에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한 방법으로 발현되었다. '매사에 설렁설렁 임하는 것'이다. (이 무슨 중2병 스러운 태도인지.. "후후.. 이봐, 난 아직 «진심»을 다하지 않았다고..!") 공부를 비롯한 모든 일을 '그냥저냥' 했다. 너 생각보다 그림 꽤 그리네, 의외로 운동신경도 있네, 맨날 놀더니 성적은 좋네... 이런 말들이 학창시절 나에게 최고의 칭찬이었다.
이런 일종의 '쿨병'의 이면에는 누군가가 "쟨 그렇게 열심히 하더니 별거없네" "쟤 되게 열심히하는데 자세가 우스꽝스럽네" 하는 평가를 내릴까 두려운 마음이 자리잡고 있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바라고, 인정 받을 때 기쁨을 느낀다. 그리고 언제나 사람들이 내게 아주 높은 기대치를 가진다고 상상한다. 이 두가지 사고방식은 당연하게도 사실무근이고, 건강하지 못한 습관이다.
설렁설렁은 전혀 멋있지 않고, 오히려 굉장히 찌질하며, 정말 멋있는 건 매일 헬스장에 들르는 직장인, 몇 년간의 연습을 거쳐 경기에 임하는 스포츠 선수, 이미 충분한 인정을 받았음에도 새로운 창작을 하고, 또다시 평가받는 데 주저함이 없는 창작자들이다. 미련하게도 이걸 깨닫기까지 많은 시간과 감정이 소모되었다. 유치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이처럼 당연한 사실을 깨닫고 나서 나의 '노력을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바보야 문제는 감정이야
매번 '노력'에 실패하고, '노력을 위한 노력'도 실패했다. (여담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재능'과 '의지', '노력'을 대척점에 두는 이야기 - 누구나 의지만 있으면 꾸준한 노력은 할 수 있어 - 에 동의하지 않는다. 의지와 노력도 엄연히 재능의 영역에 속한다고요!) 왜 난 남들처럼 열심히가 안되지? 왜 큰 일을 앞뒀는데 별 생각이 없지? 위기감이 없지? 나는 책임감이 없는 사람인가? 의지박약인가? 한량의 기질을 타고난걸까? ... 수도 없는 의문과 고민이 수년간 계속되었다.
단단한 의지력과 성실성, 자기관리 능력을 갖고 싶어 나는 어떤 게 문제인지 고민해보고 다양한 방법을 시도해봤다. 아침 일찍 일어나기, 책상 환경 매만지기, 철저한 계획 세우기, 시간 활용을 기록하기 ... 그 어느것도 나를 바꾸지 못했다. 애쓸 때 잠시 뿐, 또 다시 '노력의 둔재'인 나로 돌아왔다.
그러다 작년에 두 번 경험해본 상담심리 세션에서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그 모든 고민과 실험을 하면서 내가 아주 간과했던 것. 감정이었다. 나는 감정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편이었다. 스스로를 감정 기복이 굉장히 적고, 감정에 따라 말을 하거나 선택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이것도 사실이 아닐것이다.) 상담 선생님이 내가 꺼내든 문제에 대해 감정에 관한 질문을 자꾸 하시길래 '내가 필요한 건 그게 아닌데' 하는 반발심도 들었다. 그런데 상담실을 나오고 집에 오는 길에 선생님과 나눈 대화를 곱씹어보니, 여태 불을 꺼두고 살던 안쪽 방의 스위치를 켠 듯 했다.
이맘때 쯤 본 넷플릭스 시리즈 [퀸스 갬빗]에서 주인공이 중요한 대회를 앞두고 회피적이고 자기파괴적인 행태를 보이는 장면을 보고, 이상꾸리한 감정이입이 되면서 이 '노력문제'에 대한 나의 생각이 점점 또렷해졌다.
내가 노력 없는 능력을 동경하고 최선을 다하지 않는 건 내가 최선을 다해 노력한 어떤 일의 결과물이 대단하지 않을까봐, 혹은 사람들이 대단하지 않다고 여길까봐, 그게 두려워서 회피해 온 것이었다. 감정의 위력은 생각보다 대단했다.
스스로를 설득해야 할 때
회피는 그 당시 잠깐의 마음의 위안(이라 착각할 만한 것)을 줄 뿐,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않고 오히려 악화시키며, 그 어느 유익한 것도 생산해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인지하고, 회피라는 행동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상담때 배웠다. 감정은 막거나 억누를 수 없으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감정에 대한 태도와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제는 아무리 스스로를 재촉해도 일을 시작하지 않고, 그런 나 자신에 스트레스를 받는 악순환에 놓일 때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것이다.
- 내가 지금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가?
- 그건 현실적으로 일어날법한 일인가?
- 그건 두려워할 만큼 결정적이고 큰 일인가?
- 두려움을 돌파하기 위해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무엇인가?
시험이 코앞인데 하염없이 핸드폰만 들여다 보며 자괴감에 빠진 나새끼를 인지했을 때를 가정하여 예행연습을 해보겠다.
Q. 내가 지금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가? A. 1) 시험장에서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나 자신을 직면하는 것. 2) 좋지 않은 결과를 확인하는 것. 3) 나의 실패를 본 사람들이 나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것
Q. 그건 현실적으로 일어날법한 일인가? A. 1) 가능하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한다. 2) 가능하다. 그리고 결과 자체는 내 컨트롤 밖의 일이다. 3) 사실이 아니다. 사람들은 나에대해 비현실적인 기대를 걸지 않으며, 실망도 하지 않는다. 내가 그들을 평가하지 않듯, 그들도 각자의 삶을 살며 내 곁에 머물 뿐이다.
Q. 그건 정말로 두려워할 만큼 결정적이고 큰 일인가? A. 1) 결정적이고 큰 일이다. 스스로에 대한 신뢰가 달려있다. 2) 충격적이겠지만 인생을 좌우할 만큼 결정적이라 할 순 없다.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3) 사실이 아니니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Q. 두려움을 돌파하기 위해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무엇인가? A. 1) 그 상황의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면, 단 한 문제라도 풀거나, 단 한 단락이라도 읽어야 한다. 일단 책을 펴보자. 2) 두려움에 압도될 만큼 결정적인 일도 아니고, 결과를 컨트롤 할 순 없으니 이 두려움은 흘려보내야 한다. 3) 가짜에 근거한 두려움. 썩 꺼져라.
짜잔 문제 해결 ㅋㅋ
글로 써서 남들에게 보이기에 다소 바보같은 내용일진 몰라도, '행동'이 필요한 시점에 부정적인 악순환에 빠져버렸을 때엔 이렇게 스스로를 설득하는 과정을 거치고 나면 조금이라도 가벼운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 한가지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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